해설자
손세호(평택대학교 미국학과 부교수)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19세기 초 흑인 노예로 태어나 미국의 저명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 신문 편집인, 연설가, 저술가, 정치인, 외교관, 그리고 개혁가로서 20세기 직전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미국 흑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더글러스의 생애 시작은 여느 인간과는 달랐다. 그는 흑인 노예제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던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 남부 메릴랜드 주 해안가 이스턴(Easton) 인근에 있는 애런 앤서니(Aaron Anthony)가 소유한 홈스힐(Holmes Hill) 농장에서 프레더릭 오거스터스 워싱턴 베일리(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라는 이름의 노예로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노예는 언제든 매매가 가능했고 담보로 맡길 수도 있었으며 빚을 갚기 위해 넘겨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농장 주인이나 감독관에게 수시로 채찍질이나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 노예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글을 배우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었으므로 대부분 농장주가 인근의 다른 노예와 맺어 주는 사실혼 관계로 지내야만 했다. 또한 백인 농장주의 성적 착취로 말미암아 흑인 여성 노예에게 자식이 생기더라도 그녀의 자식들은 노예로 취급될 뿐 백인 농장주의 자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로 태어난 더글러스는 어린 시절 대부분의 노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더글러스의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Harriet Bailey)는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으므로 자식들을 돌볼 여가가 없었다. 더글러스는 인근 오두막에 사는 외할머니 벳시 베일리(Betsey Bailey) 손에서 자라나야 했다. 더글러스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매우 희미하다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역시 전혀 없었다. 더글러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백인이며, 농장주 앤서니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노예면서 고아와 다름없는 유년기를 보낸 더글러스는 6세 때 외할머니와 떨어져 앤서니가 관리인으로 일하던 인근 농장으로 보내졌다. 앤서니는 농장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규모가 훨씬 큰 로이드 대령의 대농장에서 서기이자 관리인으로도 일하고 있었다. 앤서니가 죽자 선장 토머스 올드(Thomas Auld)와 결혼한 앤서니의 딸 루크리샤(Lucretia)에게 맡겨졌고, 다시 토머스의 동생 휴(Hugh)가 사는 볼티모어로 옮겨져 휴의 어린 아들을 돌보는 일과 심부름을 했다. 이때 12세의 더글러스는 휴의 아내인 소피아(Sophia)에게 알파벳을 배웠는데, 비록 얼마 뒤에 휴의 강력한 반대와 진노로 중단되고 말았지만 글공부의 경험은 이후 더글러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엄청난 사건이었다. 더글러스는 휴가 글공부를 막은 이유가 노예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 자유를 갈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더글러스는 길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백인 아이들에게 빵 조각을 주며 글을 익혔고, 휴의 집에 있는 책이나 신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더글러스가 잔돈을 모아서 직접 구입한 ≪미국의 웅변가(Columbian Orator)≫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자유와 민주주의, 용기 등에 대한 명연설문과 논설문을 모아 놓은 이 책은 그 무렵 더글러스에게는 성경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더글러스가 당시 노예에게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문자 해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이 우려했던 대로 더글러스에게 노예제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자유를 갈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그는 주위에서 주워 읽은 지방 신문을 통해 북부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루크리샤가 죽은 뒤 더글러스는 토머스의 요구로 볼티모어에 있는 휴의 집을 떠나 다시 토머스의 농장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토머스는 노예들을 거의 굶기다시피 했으며 심한 매질을 가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더글러스는 인근 농장의 노예들과 함께 주일예배를 하면서 이들에게 신약성경을 통해 글을 가르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머스는 더글러스를 온순하게 만들고자 ‘노예 조련사(slave breaker)’로 악명이 높았던 에드워드 코비(Edward Covey)의 농장으로 보냈다. 코비는 노예에게 비교적 풍부한 음식을 제공했지만, 동틀 때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쉼 없이 일할 것을 강요했다. 또한 코비는 노예들을 심하게 채찍질해 다스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미 글을 깨쳐 백인과 흑인 노예가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자각을 갖게 된 더글러스는 어느 날 코비의 심한 매질에 저항하며 두 시간 가까이 몸싸움을 했다. 결국 코비가 더글러스에게 앞으로는 심하게 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몸싸움은 끝이 났지만, 이 일로 인해 더글러스는 처형당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코비는 열여섯 살짜리 노예와의 몸싸움에서 졌다는 소문이 나면 노예 조련사로서의 명성에 흠이 날 것을 우려해 이 일을 그냥 덮어 두어 더글러스는 무사할 수 있었다.
코비의 농장에서 1년간 일한 뒤 더글러스는 비교적 친절한 농장주인 윌리엄 프릴랜드(William Freeland)의 농장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이곳에서도 일요일이나 밤에 노예들에게 은밀하게 글을 가르쳤고, 그중 다섯 명의 노예와 북부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계획은 보트를 훔쳐 체서피크 만 북쪽 끝까지 간 다음 자유 주인 펜실베이니아까지 가는 것이었다. 1836년 부활절 휴일 직전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으나 공모자 중 한 명이 이를 누설하는 바람에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토머스는 감옥에 갇힌 더글러스를 빼내 다시 휴의 집으로 보냈다. 18세에 이르러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으로 성장한 더글러스는 조선소 견습공으로 선체의 틈을 뱃밥으로 메우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숙련공이 된 더글러스는 임금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다니며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번 돈은 일주일에 한 번씩 휴에게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